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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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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아직 오늘 중 2023. 2. 12. 15:47
출처 - 예스24

십 여년 만에 다시 읽은 책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처음 읽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른'을 강요당하는 로버트의 상황에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이 왜 청소년 필독서 목록에 들어가 있는 건가... 싶었던 것 같다.

요약하자면 첫 인상이 별로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접한 이 책이 표지가 예뻐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이야기의 시작은 옆집 아저씨네 젖소 '행주치마'의 송아지 출산으로 시작된다.

난산을 겪고 있는 '행주치마'가 호흡곤란으로 힘들어하는 걸 알고

로버트는 주저없이 행주치마의 입 속으로 손을 넣어 호흡을 방해하는 혹을 떼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고통을 참지 못한 행주치마에게 어깨를 물리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고 기절해 버린다.

그 후의 이야기들은 일정한 서사가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드러난다.

로버트는 옆집 아저씨가 답례로 선물한 아기돼지 핑키와 함께 마을과 숲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어른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아픈 비밀이야기도 알게 되고

여러 죽음과 탄생을 경험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 열 세살의 로버트를 그리며 소설은 끝난다.

 

셰이커 교의 교리대로 최소한의 기계를 이용해 가족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동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아버지.

그럼에도 5년 만 농장을 잘 지켜내면 이 땅과 집이 온전히 자기들 것이 된다며 로버트에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설명하며 죽음을 준비하던 아버지

자기가 유일하게 소유했던, 처음으로 사랑을 주어 키웠던 핑키를 죽인 너무 미운 아버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어른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며 생애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던 아버지

넘기지 못할 거라던 겨울을 넘어 5월에 가족의 곁을 떠난 아버지.

 

그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는 로버트의 자세는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이제 아버지는 아침을 드시러 오지 않을 거라는 말로 엄마와 이모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

마을로 내려가 쉐이커 교도들의 장례를 도와주는 장의사를 데려오고

부고를 알릴 사람을 추려내며 침착하게 모든 일을 정리하는 로버트의 단단한 마음이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가난으로 인해 핑키를 잃었고

이제 그 가난한 농장의 책임자가 되어버린 로버트가 건네는 '이제 편히 쉬세요'라는 인사.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이라는 제목은 마을 최고의 도축업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돼지들의 삶을 의미한다.

아이가 감정을 누르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되어가고

삶과 죽음은 대비된 저 끝과 이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정을 책임지게 된 로버트를 나이와 관계없이 이웃의 대등한 친구로 받아주는 옆집 아저씨 부부의 어른다움 역시 인상 깊었다. 나였다면 갑작스레 소년가장이 된 그를 가엽게 여길 뿐 그를 어떻게 존중할지 전혀 고민하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찾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대부분 오래오래 기억에 남고, 책장에도 오랜 시간 꽂혀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