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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아직 오늘 중 2024. 1. 14. 22:55

출처 - 롯데on쇼핑

 

"몰라, 왜 그런지. 그냥 너는 특별해."
잎사귀가 햇살 아래 반짝인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살랑 바람이 분다. 칠월 초 더위에 선풍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선풍기 바람이 그 아이의 머리칼을 흔들고, 이마는 땀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이 순간을 나는 가만히 느끼고 있다. 적어도 오 년 전 그날 이후, 이렇게 온전히 여름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 소설의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보면 시각화된 표현들이 영상을 보는 기분을 자아내는 소설이었다.

사람들의 마음 소리가 들리는 '유찬'과 

함께 있을 때는 고요를 찾아오게 해주는, 유찬에게 특별한 아이 '하지오'

유찬은 저주라 부르고 지오는 능력이라 부르는 사람의 마음 소리가 들린다는 설정은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는 걸 혼자만 모르는, '사토라레'의 주인공을 비튼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속마음이 들리지 않고, 심지어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소리까지 차단되는 

지오와 함께 있을 때의 유찬을 보면 

어쩌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오히려 중요한 한 가지는 알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설정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이 들리기에 유찬은 오히려 귀를 닫아 버린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해도 마을 사람들에게 냉소적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언제든 알 수 있으므로, 당신들 마음의 얄팍한 깊이를 이미 들어 알고 있으므로.

하지만 지오와 이야기를 할 때는 열심히 지오의 표정을 살피고, 행동을 관찰하며 지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누구보다 지오의 마음을 잘 아는 친구가 된다.

유찬이 지오에게 했듯 사람들을 관찰하고 좀더 주의깊게 바라봤다면

그들의 진심을 더 빨리 알 수 있었을 듯 싶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가고, 보듬을 수 있도록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가듯

유찬은 새별이를 일찍 용서하고, 자신이 몰랐던 사랑과 배려를 더 일찍 알았을지 모른다.

지오와 유찬이 각자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를 보듬어 가는 과정을 읽다보면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 던 아프리카의 속담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의 '이꽃님' 작가는 약간 불도저 타입인 것 같다.

작가의 책을 세 번째 읽었는데, 하나의 주제의식이 잡히면 

설정이나 구성에서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논리적 허점이 생기더라도

그냥 밀어붙여 버리는 것 같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에서는 사춘기 딸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강연을 찾아갔던 아빠는

딸과 관계 개선은 전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애를 시작해서 딸에게 재혼을 통보하고,

'죽이고 싶은 아이'에서는 전문직에 해당되는 직군들의 빈 구명을 보여주고,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아이'에겐 친절해도 그 아이가 '외지인'이면 외지인이 우선시 된다는 정주의 번영 마을.

그 지역에 정착할 사람 아니면 외지인 취급하는 텃세를 고등학생에게도 부리는 곳인데

아버지 직장 따라 내려와 있는 지오의 엄마에게는 엄청 친절했다는 것.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발령나면 그 동네를 뜰 사람들인데 왜 지오 어머니네 식구들은 외지인이 아닌 거지?

자신에게 상처를 보듬을 기회마저 빼앗았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냉소적인 유찬...그런데 알고보니

새별이를 제일 먼저 감싼 게 할머니라니...더구나 그걸 유찬이가 알고 있다니...

이 동네는 따뜻한 공간이다, 라는 작가의 설정에 맞추려다보니 이 반전 같은 설정이 좀 무리인 게

유찬이가 지오를 만나기 전, 유일하게 마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할머니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새별이를 감싸느라 마을 사람들은 좀더 마음 편히 사고의 원인을 묻을 수 있었고,

유찬이에게 상처가 아프다고 말할 기회도, 새별이가 용서를 구할 기회를 잃은 것도 할머니가 시작인데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있는 유찬이가 어떻게 할머니에게는 그렇게 순종적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청소년 소설 타이틀이어서 이 정도 구멍은 괜찮다 생각하거나 감동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로서는 이런 요소들이 주제의식이나 감동 자체를 작위적으로 느끼게 해서 재미가 반감되는 역효과였다.

그리고 지오의 새엄마가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지오의 엄마가 완치율 80%라는 것도 좀 어이가 없었는데

새엄마가 알고 있는 지오를 굳이 친척 아이라고 숨기는 그 아빠도 너무 무능해보였고,

완치율 80%의 수술을 하면서 그 20%의 불안감이 부담스러워

그 존재에 대해 처음 듣는 아빠 집에, 그것도 새엄마가 만삭인 집에

고등학생 딸을 집어 넣는 그 엄마도 정상같아 보이지 않았다.

암으로 죽는다면 억울할까 봐, 엿먹어라 하는 심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지? 싶었다.

그러면서 또 따뜻하게 포장되는, 차라리 덜 따뜻한 게 더 자연스럽고 편안했을, 억지스러운 설정들이 아쉬웠다.

 

등단이후 거의 1년마다 장편소설을 하나씩 내는 것 같고,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인 듯 싶어 읽어 봤는데..

이제 이 작가 책을 그만 읽어도 되겠다, 싶다.

그래도 작가가 가진 세계관 자체가 따뜻해서 읽는 동안 편안하기는 했다.

어쩌면 드라마 <열 여덟의 순간>이 떠올라 이 소설이 더 예쁘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설정, 비슷한 감성이서였을까... 소설의 영상화 된 표현들을 읽을 때마다 그 드라마가 떠올랐다.

시간될 때 그 드라마도 한 번 더 봐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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