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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 본문
한 아이가 죽었다.
학교에서 시체로 발견된 그 아이는 타살의 가능성이 높았고, 현장에서 발견된 벽돌에서는 죽은 아이와 절친이었다는 아이의 지문이 나왔다.
이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겠다는 기자의, 주연이와 서은이 주변인 인터뷰가 방송에 나가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재판이 열린다.
얼마 전, 고 이선균 배우의 사건이 있어서였을까.
인터뷰이들의 내용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소설 속 인물들의 말을 사실과 의견으로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의 말이 그대로 방송되었을 때,
그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의견을 근거로 자신들은 범인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이란 실제로 일어난 것, 객관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며
진실은 그 사실을 둘러싼 현상들을 맥락적으로 연결하여 사실 이면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은 앞에 놓인 사실들을 둘러싼 여러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말한 이야기 속에서 주연이는 서은이를 괴롭히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며 마음대로 부리는 '갑'의 입장에 있고
서은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밝고 착하고 따뜻한 아이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주연이에게 예속된 '을'의 관계에 있다가 끝내 살해당한 아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들 안에서 주연이가 '갑'이었다, 서은이가 '을'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판단, 의견이라는 것이다.
주연이가 서은이에게 막되먹게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둘의 관계가 갑을관계여서 서은이가 모든 것을 감내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방송에서 내보낸, '가난한', '공부 잘 하는', '집에 돈이 많은', '막되먹은' 같은 수식어들이 나열되며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일 수 있다.
모두 자신들이 다 안다는 듯, 주연이의 말을 믿어준다는 듯 다가갔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있는 진실에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주연이를 믿어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사회적 인지도와 재판 승률을 올리는 데에만 혈안이 된 김변호사도,
주연이를 믿겠다고 얘기했지만 자신의 학폭에 시달린 과거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변호사도
진실에 다가서지 못했고,
주연이가 동성애적 질투심으로 서은이를 해쳤을 수 있다는 정신과 의사도, 프로파일러도 진실에서 멀었다.
맞아, 나는 네가 좋았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뒤에서 내 욕을 하지 않을 친구라 좋았고, 내 속마음을 다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 내가 기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줘서 좋았고, 내가 잘못해도 실망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지 않아서 좋았어. 너는 그냥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라 좋았어.
- 소설 본문 중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 우리는 이런 애정을 흔히 '부모'에게 기대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연이가 갑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둘의 관계에서 을에 있는 건 주연이었을지 모른다.
서은의 남자친구가 인터뷰에서 나열한 주연이의 행동을,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전혀 무례한 행동이 아니다.
주연이 마음 속의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서은을 보호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걸 알고 있는 서은이는
주연이와의 관계에 대해 충고하는 남자친구에게
'나보다 훨씬 외로운, 그래서 나보다 힘겨운 아이'라고 이야기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오히려 자기의 분노를 자극할 수 있는 서은이의 일갈에,
자신이 진짜 서은이에게 버림받았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주연이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 거고
결국 자신이 주연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서은이 역시 주연이가 교실 앞 복도로 이동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주연이의 이런 내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설에서 구멍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는데
정신과 의사도 프로파일러도 주연과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쩌면 그들도 변호사들처럼 방송에 나온 내용을 통해 이미 마음 속의 답을 내린 상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과 의사 역시 경찰 측에서 증거랍시고 내민 주연이의 일기장 한 권만을 열심히 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의 심리 상담이나 분석은 부모와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또 여러 프로파일러들 역시 방송에서 범죄자들에 대해 분석할 때 그들의 가정환경을 분석했던 걸 생각한다면
그냥 이들의 등장은 의미가 없지 않았나, 싶었다.
혹은 진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작가의 메세지를 강조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일지도.
어쨌든 우연한 실수로 서은이를 다치게 해놓고, 119에 신고하지도 않은 그 아이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를,
방송을 본 사람들의 주연이에 대한 욕설에서 얻었듯이
진실, 사건의 본질을 알기 위해 취재한다던 기자의 말과는 달리 오히려 그 방송들은 사건의 진실을 은폐해버렸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상식적으로 애가 그렇게 됐으면 가슴 아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기자니 피디니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뭘 그렇게 캐묻는지. 먼저 간 애에 대한 예의도 없는지, 학생들 놀라고 슬퍼하는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저 뭐 하나 조그마한 거라도 나오면 이만큼씩 부풀려 기사나 써 대고 말입니다.
-중략-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야죠. 암요. 헌데 그 학생한테 진짜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아니 경찰도 아니고 판사도 아닌 양반들이 왜 결정한답니까?
- 소설 본문 '학교지킴이'중에서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내가 생각했던 것은,
서은이가 벽돌을 맞고 즉사했기를...
그래서 어두워지는 밤 동안 두려움과 안타까움 속에서 눈을 감지 않았기를...
이었다.
그리고 끝내 마음이 아팠던 것은
서은이가 너무 불쌍한 아이가 되어 버린 결말이었다.
주연이에게 서은이가 나누어준 온기는 사라지고,
주연이에게 향단이 취급만 당하다 죽임을 당한, 무력하고 자신의 의지도 없이 또래 아이의 여윳돈에 흔들리다
결국 버림받은 아이가 되어버렸다는.....
서은이의 엄마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그 사건에 관심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에게
'불쌍한' 아이만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소설 속 사람들은 주연이가 처벌받음으로써 정의가 승리했고,
그 승리에 자신들이 한 몫을 했다고 만족했겠지만
그 도취 속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무력하다'는 고정관념이 강화될 수 있다는 건 모르겠지.
재미있게 읽었지만 여러 생각이 여운처럼 남아서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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