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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이 싫어서> 본문
영화를 본 것은 이 주가 넘었는데 이제야 감상을 적네...
아마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이 정리가 잘 안 되기도 했고,
이민을 가고 싶다, 생각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다 다른 일에 바쁘기도 했고,
사이사이 이제 내가 정말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하는 나이 듦을 실감하기도 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에 끌려 영화가 보고 싶었는데
고아성이라는 주연 배우가 없었어도 영화가 보고 싶었을까, 싶기도 했다.
고아성은 우리나라의 평범한 20대 '계나'역을 잘 보여줬다.
서울의 누구나 이름을 아는 괜찮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경쟁사회에서는 떨어지는 학벌,
일평생 열심히, 성실하게 살며 자식들을 사랑하고 헌신했지만
자본사회에서는 부족한 부모,
오랜 기간 사랑했고 이제 직장인이 되며 다른 이름의 관계로 변화해야하지만
결혼이란 현실에서는 잘 맞지 않는 신발,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에 기대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려니 하고 넘기는 현실들이지만
행복이라는 내적만족을 얻기에는 너무도 자신을 갉아먹는 부조리들.
그래서 계나는 한국을 떠나기로 한다. 행복하려고, 행복하기에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한국'을 떠나며
장녀라는 책임감이나 오랜 연인에 대한 사랑, 한국 사회에서 자신에게 얹어졌던 것들을 떨군다.
비행기에 실을 수하물 무게를 맞추기 위해 이거저거 비워도 커다랗고 무겁기만 한
계나의 가방처럼
호주에서 계나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다.
호주의 영주권을 얻기 위해 갖춰야할 조건들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적 셰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씩 하며 대학원 수업을 듣는 시간들 역시 만만하지 않다.
한국에서 계나는 날이 서 있었다면, 호주에서의 계나는 절박해 보였다.
그 절박한 시간들과 위태로웠던 순간들을 지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제 호주의 영주권을 얻을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호주에는 자연재해가 닥치고, 계나의 호주 적응을 도왔던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계나는 한국에 안주할지 다시 한국을 떠날지 갈등한다.
오랜 시간 시험을 준비하던 동기의 자살,
원하던 기자가 되었지만 어딘가 우울해진,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옛 연인,
더 늙어버린 부모와 이제 자기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열심히 살아가는 동생 미나.
계나의 동생 미나에 대해서 영화는 많은 걸 알려주지 않는다.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하고, 몸에 문신을 하고, 비속어를 짧게 내뱉는 모습 등을 통해
미나는 계나에 비해 '스펙'이 많이 부족한 캐릭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나에 비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듯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음악이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미나와 달리
계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계나가 어려서 좋아했다는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 동화를 보여주며.
영화의 제목을 봤을 때, 한국이 가진 부조리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싶었는데
'계나'라는 개인의 행복 찾기로 끝맺는 결말이 조금 씁쓸했다.
나도 이민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름 가고 싶은 나라의 이민자 조건도 찾아보고 대사관 위치도 알아보고 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게 가장 마음 아팠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피하고 싶었던 부조리나 차별 같은 사회적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는 걸 안다.
이상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유토피아(Utopia)의 어원이 '어디에도 없는 곳'인 이유를 이해하게 된 거다.
그래서 자기 몸만한 짐들을 안고 공항 대기실에 앉아 있던 계나의 마지막 모습이 더 마음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계나가 생각하는, 자기 행복은 무엇일까.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을 어쨌거나 '따뜻함'을 찾아가면 된다.
하지만 계나는 무엇이 싫어서, 혹은 무엇을 찾아서 떠나는 걸까.
개인의 노력과 관계없이 '삼신할머니의 랜덤'으로 얻어진 출생의 운이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하는 게 심화되어가는
한국 사회가 '싫어서'라면 그녀는 호주에 정착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곳의 정착을 도왔던 가족의 동반자살 사건이 충격일 수는 있으나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 영주권을 얻었고, 더 좋은 직업들을 노려볼 기회가 열렸으니까.
그러나 계나는 호주에 정착하지 못한다.
사랑도 계나를 안정시키지 못했고, 무언가를 하겠다는, 계나를 행복하게 하는 어떤 게 나오지 않는다.
음악과 연인만 있으면 행복한 미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어쩌면.... 정말 '한국이 싫'은 이유는 '나'를 개인으로 정립하고, 자신의 삶을 지탱해갈
자기만의 철학을 가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사회화 될수록 끊임없이 '숫자'에 얽매이는 삶을 살게 된다.
몇 등, 몇 등급, 상위 몇 위의 대학, 연봉 얼마, 너네집 몇 평, 너네 부모 연봉 혹은 자산 얼마.....
취미 삼아 블로그를 하든 SNS를 하든 거기에 '부수적'으로 딸린 좋아요와 방문자 수에 휘둘리며
내가 사는 삶이나 취미 생활의 의미를 그 숫자가 가져가게 만든다.
자기 만족은 루저의 정신승리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그 분위기가 경쟁과 맞물려 인문학이 급격하게 죽어가는 한국 사회.
천 년 넘게 우리 민족을 지탱했던 정신적 가치들은
36년의 일제강점과 해방후 미군정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전통적=미개한=열등한=진부한=퇴보적이라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급격한 근대화와 기계화 속에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기대게 만들 정신적 안식처가 망가진 채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만을 추구하는 사이
우리는 '숫자'만을 바라보며, 숫자에 의해 내 행복을 보장받고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싶었다.
영화는 불친절해서 시간과 시간은 뚝뚝 단절되었고
때로는 주인공과 관련된 주요한 사건임에도 결과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건 관객의 몫이었는데
잘린 경계들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역시 골라야해서 편하게만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영화가 가진 메시지에 비해서는 무난하게 봐지는 영화였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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