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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 본문
간만에 읽은, 400쪽이 넘는 장편소설이었다.
어느 날, 만 20세가 넘은 모든 사람들의 집 앞에 하나의 상자가 나타난다.
누가 보냈는지, 어떻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상자 안에는 끈 하나가 들어있고,
사람들은 그 끈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수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생각났던 소설이 "눈 먼 자들의 도시"였다.
하지만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인간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었다면
이 소설은 인간이 '현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가를 보여주었던 던 것 같다.
모두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동안 자신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짧은 끈'을 받은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 이 혼란과 새로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차별을 선동하고, 혐오를 뿌리내리도록 만드는 정치인의 모습은 미국의 트럼프 뿐 아니라 혐오의 정치를 하는 우리나라의 한 정당의 많은 정치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이 만드는 차별적 시스템은
개개인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짧은 끈을 가진 사람들은 구직에 문제가 생기고, 대출을 받기 어려워지며 여러 직군에서도 배제되게 된다.
소설의 끝은 '끈'이 나타난지 이십 여년 가까이 흐른 뒤의 모습까지 그려내는데
끈이 처음 나타났던 1년 안에 만들어진 '짧은 끈'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에게 모두 평등한 죽음이라는 대상에 대한 정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 차이를 이용해 차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프레임에 쉽게 동요하는 대중 심리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나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라면 그 상자를 열어 보았을까.
나라면 짧은 끈을 확인해도 그 운명을 수용하고, 수긍하며 살 수 있을까.
나라면 불안이 확산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몇몇 사람들을 뉴스로 확인하며 그 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일반화하며 비난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긴 끈을 가진 사람들의 고정관념에서도 우리가 흔히 삶에 대해 생각하는 편견을 볼 수 있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긴 수명 동안 '건강한 상태'일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였다.
장수와 무병은 사실 별개의 문제일텐데 말이다.
또, 상자를 열어보지 않은 에이미가 십사년 정도의 수명이 남은 벤과의 연애에 고민을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벤과의 연애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십사 년 후 과부가 되어 혼자 아이를 키우고, 교사의 박봉으로 힘겹게 생활을 해나가는 상상을 하며 많은 고민을 한다.
에이미의 고민은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좀 답답했던 게 앞으로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에이미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우리는 삶은 당연히 건강과 함께 하는 것이며,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유한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나'의 죽음은 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고 계속 버티는 게 답일 때도 있죠. 하지만 내려놓는 것에도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 애초에 사람들을 '긴 끈'과 '짧은 끈'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을 차별하기가 너무 쉬워졌잖아요."
"하지만 평생을 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에 잘 압니다. 남들과 다른...... 취급을 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인생은 상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받기 위한 싸움인 것 같기도 하지요. (생략) "
과거에는 신분이 계급을 만들고, 현대에는 자본이 계급을 만든다.
그런데 거기에 '수명'이 차별을 만드는 기준이 된다...
조금은 끔찍하고, 처음 프레임을 만들어 그것을 고착화 시키는 것은 쉽고 그 잘못된 프레임을 깨뜨리는 건 어렵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 안에서도 상자에 대한 세계적인 동향을 그려내는데 부정적 상황에서는 중국과 북한을,
긍정적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을 가져오는 것도
미국인들이 아시아의 국가들에 대해 갖는 초반의 프레임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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