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호텔 창문 -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본문

보다, 듣다, 읽다

호텔 창문 -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직 오늘 중 2020. 5. 25. 23:27

"(생략) 운규가 널 데리고 오면서 만 원인가 이만 원인가 친척한테 받아왔는데,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였어. 그러고 보면 네가 돈줄이었어. 네 핑계를 대면 푼돈이나마 챙길 수 있었거든. 그걸로 술을 샀지, 쌀밥만 먹지 않으려면 주변 텐트를 돌면서 참치나 김치를 얻어야 했어. 운규가 제일 구걸을 잘 했어. 넉살이 좋아서 뭔가 줄 때까지 절대 안 비켰어."

"늘 그런 식으로 뭔가를 뺏었어요."

-편혜영 <호텔 창문>중에서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그날 선생님의 그것을 모욕했어요."

"내 무엇을 모욕했지?"

선생님의 눈은 너무 고요해서 얼핏 보면 건강한 평안에 든 사람 같았다. 이제 막 휴양지에서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으러 가는 사람처럼, 저녁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서서 강변이나 운동장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 눈과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달랐고 나는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점에서 적잖은 노여움을 느꼈다.  - 중략 -

"너가 어렸을 때 봤다던 그 꽃은 데이지가 아닌 것 같더라. 데이지는 여러 겹인데 그건 팬지였어."

"괜찮아요, 선생님."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 데이지도 아닌데 데이지라고 하고, 사실은 팬지인데."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세요, 선생님."

나는 괜히 눈물이 나서 엉엉 울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선생님의 눈시울도 붉어지다가 고개를 돌려 재빨리 그 순간을 모면했다.

-김금희 <기괴의 탄생>중에서

 

 그러나 유리 커플과 헤어지고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엔 다시금 너와 내일, 모레, 주말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할 수가 없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가진,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 않은 이런 것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너와 나, 우리의 밤이다.

-김혜진 <자정 무렵>중에서

 

"잘 들어갔니? 나 사실 네 기도 매일 해, 또 보자."

P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난 괜찮으니까 네 기도를 많이 해. 잘 자!^^"

메시지를 보내고 남은 밥을 마저 먹고는 송이의 가방에서 알림장을 꺼내 보았다. 엄마랑 송이가 방과후 수업 신청서며 준비물들을 빠짐없이 준비해놓아서 나는 그냥 쉬다가 잠들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남들처럼 괴롭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주한 <한 사람을 위한 마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