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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절연>

아직 오늘 중 2010. 10. 8. 20:02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려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은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눈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 눈을 뜨고 봐야 삶은 난해하고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 이병률, 시집 <찬란>중에서, 문학과지성사,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