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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그리고 베를린에서>

아직 오늘 중 2021. 5. 17. 20:57

도서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뉴욕의 하시디즘 유대인 공동체에서 살던 에스티는 베를린으로 도망간다.

 

종교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는 것 같지만

그 단체는 폐쇄적인 경우가 많다.

특히 전통만을 내세우고, 자신들이 따르는 교리만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배타적인데

종교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다른'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상한 것, 옳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에스티가 어렸을 때부터 받았을 편견과 무시하는 시선...

그래서 에스티는 자신이 그곳의 다른 여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방식대로 적응하며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21세기에 살면서 부부 생활도 규칙에 따라 금요일에만, 생리 중인 여성은 불결하므로 남편 곁에서 잘 수 없고

여자라면 출산과 육아를 강요받는 그 곳에서 에스티가 꿈꾸었던 새로운 삶이란 

사랑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그 속에 반듯하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방인인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라는 주홍 글씨와 자신의 삶 하나 유지하지 못해 공동체가 아니면 무너져버렸을 못난 남자의 딸이라는 비웃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지만 결국 에스티는 자신을 찾아 그곳을 벗어났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탈무드의 경구를 따라.

 

에스티의 엄마가 사위 얀키에게 던진 말

"왜? 하느님이 너희들 것 같아?"

라는 말에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어야할 종교가 어떻게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차별하고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민족, 같은 종교, '우리'의 규칙과 조건에 합당한 사람만이 '우리'라는 그 비뚤어진 선민의식.

타인을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선함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신앙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상상일 뿐인 규칙'에 사로잡혀 자기 앞의 가까운 사람도 아끼지 못하는 신앙이 어떻게 민족과 인류에게 유익할 수 있을지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든 허울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드라마였다.

 

또 하나 보면서 재미있었던 건

전통을 좋아하고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시가의 간섭이 무섭다는 것? 

얀키의 마마보이 기질 역시 어느 사회에나 저런 덜 자란 사람은 있는 거구나 싶었다. 폭행을 당하다시피한 아내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처음 느낀 쾌감에만 만족해하는 그 이기적인 모습이, 그가 어떤 사회에서 자랐는가를 생각하며 얀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날려버렸었다. 더구나 에스티에게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라고 몰아부쳤던 게 더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자랐더라도 좀 더 독립적이고 성숙한 사람을 만났다면 에스티가 상처받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또 만약 그랬다면 그냥 사라졌을 에스티의 예술적 재능은 아깝기도 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결혼 풍습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문화를 알게 되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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