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차별은 나쁜 사람들만 하는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돈만 밝히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있는 집 자식과 없는 집 자식을 '너희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말로 차별하고,
욕심많고 못되게 생긴 아줌마들이나 술 취한 꼰대형 아저씨들이 유색 인종들에게 몹쓸 말을 내뱉고
사모님형 예비 시엄마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부족한 며느릿감에게 내뱉는 모욕과 차별의 말들을 내뱉는다.
그러면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못 됐네."
이 책은 그런 차별에 대한 편견을 벗겨준다.
일상에서 우리는 불쑥불쑥 차별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고
일상같은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우리는 '그 문제는 좀 다르지 않아?'라며 "차별"을 하게 된다고
조곤조곤, 쉽고 편한 말투로 알려준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좀 불편해지기도 하는데
'언어'가 가진 차이를 분별하는 기능이 '편견' 혹은 '차별'을 자아내는 원흉(?)이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물론, 그만큼 어떤 대상에 대한 지칭어를 조심히 만들어야 하고
표현에 담긴 차별의 의미를 걸러내기 위해 우리는 그만큼 주의를 기울여야한다는 메시지인 것은 알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예시도 있었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난 대선후보 토론 때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던졌던
"동성애를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이 부분에서 차분하던 글쓴이의 어조는 무척 격양되면서
나라의 대표가 되어야할 사람이 동성애에 대해 호불호를 밝히면서 차별을 조장했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이어졌던 "그러나 그 이유로 동성애를 차별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평등은 그 대상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호불호에 따라 어떤 대상을 차별하지 않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고양이를 괴롭힐 정당한 이유는 될 수 없다.
고양이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살아있는 생명이니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은 말이 안 되니 고양이를 좋아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글쓴이가 말한 것처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 그 자질을 검증하기 위해 열린 토론회에서
특정 문제에 대해, 집단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호불호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 때에도 나는 그 호불호의 발언에 묻혀버린 "그래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 정말 중요한 메시지가 묻혀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 차별받는 동성애자들을 위해 "나는 동성애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차별을 없애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드라마 '지정생존자 60일'에서 한 인물이 이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은 평등보다 차별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차별에 대해 조심하는 마음이 없다면 차별에 쉽게 물들겠구나.
쉽게 물들어버리면 표현이 쉬워지고, 쉽게 말하려다보면 '평등'이 불편해지겠구나.
하지만 좀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불편함에 대해 고민하고 조심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나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