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듣다, 읽다

시집 <눈사람 여관>

아직 오늘 중 2015. 8. 26. 14:55



나는 이병률의 사진을 좋아한다.

그의 여행기를 좋아한다.

처음 그의 글을 접한 것은 그의 여행산문집 <끌림>이었다.

명소들을 중심으로 빤한 사진, 빤한 감상에 수식어만 남발되는 여행기들이 싫어서

산문집을 고르기 전 그의 약력을 먼저 보았더랬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라니 믿고 읽어 보자.

그렇게 인터넷 서점에서 처음 주문했던 <끌림>이 인연이 되어

시집도 세 권째 읽게 되었다.



우선은 문지에서 나오는 시집들이 그렇듯 책의 맨 뒤편에 있는 글이 마음에 들었다.


아픈 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시집에 실린 시들도 그의 여행산문집에서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그의 감성들이 돋보였다.


-중략-

손목이 문제였다

귀를 막을 때도 무엇을 빌 때도 짝이 맞지 않았다


손목 군데군데 손상된 혈관을 기우느라 밤을 지새울 예정이다

저 바람은 슬픔을 매수하는 임무로 고단할 것이므로

나는 이제 내 손목에게 슬픔을 멈추어도 된다고 말한다

-시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중에서


-중략-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

-시 <음력 삼월의 눈>중에서


그 사람은 나 모른대요


함께 불행해도 좋을 사람이었는데 나를 비키겠대요


하늘에 기러기 열 마리쯤 날아갈 자리 표시해두었는데


태어나 한 사람의 불이 되기를 얼마나 바랐는데


달밤에 술 채운 적 없대요


큰불이 났는데


잇몸에서는 질금질금 간수가 새는데


잠시만 다녀오겠다며 기차 앞 칸으로 가 영영 오지 않은 사람처럼


그 사람은 가만히 나 모른대요

- 시 <그 사람은>



잔잔하게,

어떤 의미나 진지한 삶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기 보다는

찰칵

찍고 가는 느낌의 시들.


여름이 가면서 조금은 고요함이 필요했던 내게

좋았다.


시 출처 : 문학과지성사,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2013년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