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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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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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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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을 갓 넘긴 아이여서 나도
서툴기 짝이 없었으나
세상은 툭하면 발길로 나를 걷어차곤 했다
그때마다 이젠 끝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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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인포리' 중에서 -
......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덯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택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 시 '풍경' 중에서 -
......
늦게 피는 내게 눈길 주는 이 없고 사랑도 나를 알아보기 못한 채 낙화는 빨리 와 꽃잎 비에 젖어 흩어지며 서른으로 가는 가을은 하루하루가 스산한 바람이었지요 내 마음의 꽃잎들도 젖어 뒹굴며 나를 견디기 힘들어했지요
......
그러나 이 산에 내 그림자 없고 바람만 가득한 날에도 기억해주세요 늦게 피었어도 그 짧은 날들이 다 꽃 피는 날이었다고 일찍 잎은 지고 그 뒤로 오래 적막했어도 함께 있던 날들은 눈부신 날이었다고
- 시 '늦은 꽃' 중에서 -
......
현세는 언제나 노론의 목소리로 회귀하곤 했으나
노론과 맞선 날들만이 역사입니다
목민을 위해 고뇌하고 싸운 시간만이 운동하는 역사입니다
누구도 살아서 완성을 이루는 이는 없습니다
자기 생애를 밀고 쉼 없이 가는 일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진미진선의 길입니다
......
- 시 '새벽 초당' 중에서 -
- 도종환,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 2011년 -
세상에 대한 시인의 진지한 걱정과 한숨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이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과 통탄이
마디마디
아름다워,
강직하여
시를 읽는 내내
나는 자주 멈춰야헸다.